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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무에 깃드는 천년의 건축 중요무형문화재 제74호 대목장(大木匠) 최기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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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무에 깃드는 천년의 건축 중요무형문화재 제74호 대목장(大木匠) 최기영

소나무에 깃드는 천년의 건축 중요무형문화재 제74호 대목장(大木匠) 최기영

최기영 대목장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전통건축 장인으로 중요무형문화재 제74호이자 유네스코 지정 인류무형문화유산이다. 국보 1호 숭례문을 축조했던 죽정(竹亭) 최유경(1343년~1413년)이 후손이자, 목수였던 아버지에 이르기까지, 그의 몸에는 대대로 목수의 피가 흐르고 있다.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인 국보 제15호 안동 봉정사 극락전과 정읍 내장사, 영주 부석사, 경주 월정교 등 수많은 사찰과 고택이 그의 손을 거쳐 새 생명을 얻었다. ‘이음새 하나가 천년 간다’는 마음가짐으로 그는 오늘도 전통건축 현장을 누빈다.

대목장 최기영
interview

대목장은 목수 가운데 으뜸이자 우두머리라고 할 수 있으며, 도편수라고도 불린다. 대목장은 전통건축물의 설계부터 마름질, 건설, 감리 등의 모든 과정을 총괄하고 감독한다. 기와장, 단청장, 석장 등을 통솔하기에 전통건축 전 분야에 대해 꿰뚫고 있어야 한다. 세종 때는 정5품의 고위 관직으로 대우받았다. 열일곱의 어린 나이에 이 일을 시작하여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며 살아온 최기영 장인은 푸르른 소나무처럼 곧고 강건하게 이 길을 걸어왔다.

어떻게 목수 중에서도 으뜸인
대목장의 길을 걷게 되셨나요?

일찍부터 아버지를 여의고 생업에 뛰어들어야 했어요. 돈이 되는 일이면 가리지 않고 하던 시절이라, 건축 일도 그저 먹고 살기 위해 시작한 일이었죠. 1961년 어느 날, 때마침 고향 충남 예산 근처 수덕사의 일주문(一柱門) 공사가 있었는데, 그 공사를 지휘하던 당대 제일의 대목장 김덕희 선생님 밑에서 일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열일곱부터 그렇게 스승님의 일행을 따라 방방곡곡을 누비며 수덕사, 서울 관음사, 창경궁, 덕수궁, 원주 상원사 등의 해체와 복원을 함께 했습니다. 잔심부름 하나 건성으로 하지 않았고 곁눈질로 스승의 비법을 익혀갔어요. 선배의 연장을 틈틈이 빌려 도구의 성질을 홀로 깨우치면서 무엇이든 제대로 하지 않으면 죽는다는 심정으로 임했습니다. 오밤중에 모르는 것이 있어도 물어볼 사람이 없을 때는 궁궐 담벼락을 뛰어넘어 갔어요. 구석구석 살펴보며 추녀 밑에 쭈그려 쪽잠을 자다가 아침에 궁궐 문이 열리면 숙소로 돌아오곤 했지요.

최기영 대목장은 열일곱 살부터 스승을 따라 방방곡곡을 누비며 대목장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는 당시 창경궁(왼쪽)과 덕수궁 해체복원 공사 현장에도 있었다고 한다. ⓒ디자인밈 최기영 대목장은 열일곱 살부터 스승을 따라 방방곡곡을 누비며 대목장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는 당시 창경궁(왼쪽)과 덕수궁 해체복원 공사 현장에도 있었다고 한다. ⓒ디자인밈
‘중요무형문화재’,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명예로운 수식어를 많이 얻으셨는데요.

저는 그저 배우지도 잘나지도 못한, 더는 내려갈 곳이 없는 ‘한낱 목수’에 불과해요. 그런 내가 부모의 은덕이 큰 사람, 최고 교육기관을 나온 사람과 삶이 같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놀 때 똑같이 놀고, 잘 때 똑같이 자면 언제까지나 제자리일 수밖에 없다는 마음으로 내 분수에 맞는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기 때문에 조금이나마 이룰 수 있었던 것이죠. 집을 다 짓고 나서도 기둥이나 서까래가 각각의 분수에 맞지 않으면, 그대로 뽑아버리고 다시 지었어요. 체계적으로 알려줄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설계와 제도 같은 고등건축지식을 잠을 아껴가며 독학을 했죠. 1400년 전 백제 능사5층목탑의 ‘하앙식 공법’을 터득하기 위해서는 일본과 중국을 수차례 오가며 백제 시대 선조의 흔적을 좇기도 했습니다. 노력하고 베푼 만큼 받는 다는 것이 제 인생철학입니다. 비단 건축뿐만 아니라 인간사도 똑같아요. 인과응보의 원리를 따르듯 요행을 찾아서는 안 되는 법이죠. 내 비록 일흔이 넘었지만 여전히 57년 째 만근 중인 이유도 그것입니다. 부처와 예수는 날 때 가진 마음을 죽을 때까지 지켰기 때문에 성인이 되었다고 생각해요. 구도자의 마음으로 앞만 보고 가야지, 뒤돌아보거나 후회할 여유가 내겐 없습니다.

1400년 전 백제시대의 능사5층목탑을 재현하기 위해 일본과 중국을 수차례 오가야만 했다 ⓒ디자인밈 1400년 전 백제시대의 능사5층목탑을 재현하기 위해 일본과 중국을 수차례 오가야만 했다 ⓒ디자인밈
전통건축의 뼈대와도 같은
소나무에 대한 애착이 남 다르시다고 들었습니다.

소나무와 흙, 화강암, 창호지는 전통건축의 바탕이에요. 소나무와 화강암으로 뼈대를 쌓아 올려 흙과 창호지로 살을 더하는데, 살이 곪아도 문제지만 뼈대인 소나무가 어설프면 집이 그대로 무너져 내리게 되는 거죠. 좋은 소나무는 제 목숨과도 바꿀 수 있어요. 특히 소나무 중에 으뜸인 좋은 황장목을 구하려고 첩첩산중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오르내렸습니다. 대구 대견사를 복원하던 당시에는 강원도 양양의 800m 야산에서 황장목을 구하기도 했죠. 십 여 년 전에는 아예 정선과 강릉 일대 소나무 임야를 사들였어요. 그곳의 소나무들은 생전에 베지 않을 생각입니다.

우리 소나무는 흰색, 노란색, 청색, 붉은색인 네 가지 색을 발산하는데, 뚜렷한 사계절이 고르게 담겨 있기 때문이죠. 그 수려한 색채는 외산 고급 소나무에서는 결코 찾아볼 수가 없어요. 강도나 신축성도 비할 바가 못 되고 송진도 훨씬 끈끈하고 강합니다. 그래서 좋은 소나무를 보면 ‘야 이놈아!’라는 소리가 절로 나오곤 합니다. 소나무는 천 년을 살고, 목수 손을 빌어 또 다시 천 년을 사는 법입니다. 사람의 피와 같은 송진이 흐르며 죽어서도 살아 숨 쉬는 셈이죠. 좋은 소나무로 지어진 한옥이 육신과 정신을 정화시키고 집안의 습도, 온도, 소음이 알아서 관리되는 것은 자연스런 이치입니다.

우리 전통건축물의 뼈대인 황장목은 경북 울진과 봉화, 강원도 양양과 정선, 강릉 등지에서 자생하고 있다. ⓒ디자인밈 우리 전통건축물의 뼈대인 황장목은 경북 울진과 봉화, 강원도 양양과 정선, 강릉 등지에서 자생하고 있다. ⓒ디자인밈
명실상부 전통건축의 거장으로 자리를 잡으셨다.
아직도 이루지 못한 꿈이 있으실까요?

스승을 따른 지 7년이 되어갈 무렵에 나만의 길을 찾아 독립했죠. 그 후부터는 고택 수백 채, 남한산성, 양평 용문사, 대구 대견사, 안동 봉정사, 영주 부석사와 같은 굵직한 건축물들과 국보들 그리고 수많은 사찰을 매만져왔습니다. 2010년에는 17년에 걸친 187동의 백제문화단지 공사를 드디어 완공했어요. 어느새 돌아보니 까맣던 머리카락이 백발이 다 되었네요. 아직까지 이루지 못한 간절한 꿈이 있다면, 경주 황룡사지 9층 목탑을 복원하는 것이죠. 황룡사지 9층 목탑은 약 80m로 추정되는 신라 시대 목탑인데, 조선 시대까지도 이보다 높은 단일 건물은 지어지지 않았어요. 현존하는 가장 높은 목탑인 중국 불궁사 5층 목탑보다도 약 10m 이상 더 높아요. 선덕여왕 14년(645년)에 지어졌지만, 13세기 무렵 몽골의 침입으로 완전히 소실되었죠. 세계 어디에도 없는 우리 선조의 역작인 만큼 서둘러 복원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최기영 대목장의 손길을 거쳐 탄생한 경주 월정교 ⓒ디자인밈 최기영 대목장의 손길을 거쳐 탄생한 경주 월정교 ⓒ디자인밈
대학교육기관과 전승교육관에서 후진 양성에 힘쓰시고 계신데요.
앞으로 더 계획하시고 있는 일이 있으시다면?

한글 건축 용어 사전을 편찬하는 것이 또 하나의 숙원입니다. 현재 사용하는 건축 용어에는 일제의 잔재와 왜곡이 심각해서 우리말로 착각할 지경입니다. 사전 편찬을 위해 자비를 출연하고 예산안을 정부에 제출했는데도 10여 년 넘게 표류 중인 것이 안타깝습니다. 입으로 제사만 지내면 다음 날 후손에게 물려줄 것이 하나도 없어요. 우리의 것을 짓는데 언제까지 일본말을 쓸 수는 없는 일이잖아요. 하루빨리 바로잡는 것이 저희 막중한 사명이고 책임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