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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당신의 마음을 닮은 얼굴 서민들의 초상, 창령사터 오백나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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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당신의 마음을 닮은 얼굴 서민들의 초상, 창령사터 오백나한

나와 당신의 마음을 닮은 얼굴 서민들의 초상, 창령사터 오백나한

이제는 흔적만 남은 폐사지에서 우연히 마주친 나한(羅漢)에는 조선시대 민초와 현대 서민들의 소망이 담긴 은은한 미소가 깃들어 있다. 순진무구한 아이의 모습을 닮은 오백나한을 통해 우리는 전 지구적인 감염병으로 인해 누적된 피로를 잊고 잠시 안식의 기운을 얻을 수 있을지 모른다. 종교적 신념을 떠나 우리 자신의 마음을 닮은 나한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마음의 평화를 느껴보는 것은 어떨까.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불법을 깨우친 500명의 제자

오백나한(五百羅漢)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입적한 뒤 그의 가르침을 따르기 위해 모인 500명의 불교성자를 가리키는 단어다. 불가에서 깨달음의 한 단계인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성취한 500명의 성자를 ‘아라한’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여기서 아라한(阿羅漢)이란 고대 인도어인 산스크리트의 ‘arhan’를 소리나는 대로 적은 말이다.

세계적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는 고려불화 중에는 수행자의 모습을 한 나한이 등장하기도 한다. 불법을 깨우쳐 신통력을 지니게 된 나한은 고려시대에는 몽골의 침략에 맞서고자 하는 왕실의 염원을 담아 수호신 역할을 했다. 국내에 보관된 고려의 나한도 중 한 점에 “눈앞에 다가온 적을 속히 멸하시어 나라 안팎을 편안케 하소서”라는 문구가 발견된 점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고려시대 나한도(羅漢圖)는 현재 우리나라를 비롯해 일본과 미국 등지에 불과 10여 점만 남은 것으로 알려져 문화재적 가치 또한 매우 높다.

수국사 십육나한도(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243호) ⓒ문화재청 수국사 십육나한도(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243호) ⓒ문화재청

이처럼 신성한 존재인 오백나한은 아름다운 자연의 풍광에 숨겨져 그 신비감을 드러내는 존재이기도 하다. 북녘 금강산이나 제주 한라산에 운집한 기암들을 가리켜 옛 사람들은 만물상 혹은 나한이라 불렀다. 특히 제주 한라산의 영실기암은 마치 부처님이 설법하던 영산과 비슷하다고 하여 영실(靈室)이라 하고, 뾰족하게 솟아오른 바위들은 아라한의 모습과 닮았다 하여 오백나한이라 하여 통칭 ‘영실기암과 오백나한’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한라산과 제주의 푸른 바다가 발아래 펼쳐지는 진기한 풍경에 이 같은 별칭을 붙여준 것은 그 옛날 이미 오백나한의 존재가 가지고 있는 영험함을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제주 한라산 동쪽 사면의 바위 봉우리들은 명승 제84호 ‘영실기암과 오백나한’으로 지정되어 있다 ⓒ디자인밈 제주 한라산 동쪽 사면의 바위 봉우리들은 명승 제84호 ‘영실기암과 오백나한’으로 지정되어 있다 ⓒ디자인밈

불심 깊은 부부가 발견한 천년의 미소

2001년 영월군 남면 창령사터에서 발견된 오백나한 ⓒ국립춘천박물관 2001년 영월군 남면 창령사터에서 발견된 오백나한 ⓒ국립춘천박물관

그런데 부처님의 제자인 오백나한이 마냥 신비롭고 다가서기 어려운 존재였던 것만은 아니다. 지난 2001년 영월 창령사터에서 발굴된 오백나한의 표정과 미소는 마치 우리 주변의 누군가를 닮은 듯한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창령사터 오백나한이 발굴된 과정은 우연치고는 극적인 이야기가 담겨 있다. 20여 년 전 영월군 남면의 깊은 산골에 불당을 세우려던 어느 부부가 공사 중에 발견한 돌이 나한상으로 밝혀진 것이다. 불심이 깊은 이들 부부의 작지만 큰 발견은 본격적인 발굴로 이어졌다. 강원문화재연구소는 발굴 작업을 통해 316점에 달하는 나한상을 찾아냈으며 기와 파편에 새겨진 문자를 통해 그곳이 창령사라는 절이 있던 자리임을 확인했다. 고려 후기 혹은 조선 초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 오백나한들은 제각기 다른 표정을 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 모습 또한 같은 것이 하나도 없다. ‘미소 띤 나한’, ‘생각에 잠긴 나한’, ‘합장하는 나한’, ‘바위 뒤에 앉은 나한’ 등을 바로 그러한 예로 볼 수 있다.

아이를 닮은 천진한 표정 속에 담긴 울림

창령사터 오백나한은 국립춘천박물관 브랜드실과 VR전시를 통해 만날 수 있다 ⓒ국립춘천박물관 창령사터 오백나한은 국립춘천박물관 브랜드실과 VR전시를 통해 만날 수 있다 ⓒ국립춘천박물관

기쁨과 슬픔, 희망과 분노처럼 평범한 서민들이 경험하는 다양한 감정들이 새겨진 창령사터 오백나한은 2018년에서 2019년까지 2년여에 걸쳐 춘천과 서울, 부산을 돌며 순회전을 펼쳤을 만큼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았다. 이 전시는 국립중앙박물관이 선정한 ‘2018 올해의 전시’로 기록되었으며 이듬해인 2019년에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특별전 형태로 개최되기도 했다.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은 49일 만에 4만8000명이 넘는 관람객 수를 기록했으며 도록은 3쇄가 완판되었을 정도로 반응이 뜨거웠다.

현재 강원도 춘천에 위치한 국립춘천박물관 브랜드실에 전시되고 있는 창령사터 오백나한은 코로나19로 인해 관람이 수월하지 않은 상황에서도 관람객들이 꾸준히 찾고 있다. 감염병으로 인한 전 세계적 팬데믹 속에 살아가고 사람들이 오백나한의 표정 속에서 휴식과 치유를 발견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거친 화강암 위에 새겨진 얼굴이지만 아이와 같은 천진한 미소 속에는 지친 마음을 보듬어 주는 안식이 담겨 있다. ‘창령사터 오백나한’ 도록 책머리에 수록된 글은 이러한 평범한 깨달음의 울림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깨달음이 그렇게도 아름다운 것인가 오백나한이 오백 가지의 웃음으로 만고에 전한다. 고려 때에 해탈의 염원을 담아서 거친 화강석으로 다음은 나한의 얼굴이지만 그 웃음을 보는 순간에는 대리석으로 다듬은 비너스보다도 더 강한 빛을 본다. 내 마음이 어두울수록 그 거칠게 다듬은 얼굴들이 나의 어머니인 듯 나의 절친인 듯 마음을 밝히는 것은 세상 그 어느 조각가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닌 듯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