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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례도감의궤(嘉禮都監儀軌)』는 1866년(고종 3) 고종(高宗: 1852-1919)과 명성황후 민씨(明成皇后 閔氏: 1851-1895)의 혼례 과정을 기록한 의궤(儀軌)이다. 왕, 왕세자, 왕세손의 혼례를 가례(嘉禮)라고 한다.     고종은 12세에 왕이 되었으나 철종의 상중기간이라 혼례를 올릴 수가 없었다. 철종의 3년상이 끝나고 1866년 고종의 나이 15세에 혼례를 올릴 수 있게 되었다.   신부 간택을 위해 1866년 1월 1일자로 12세에서부터 17세에 이르는 여자들에게 금혼령이 내려지고, 그해 2월 25일 오시(11-13시) 초간택(初揀擇), 그달 29일 손시(7-9시 사이)에 재간택(再揀擇), 3월 6일 손시에 삼간택(三揀擇)을 행하였다. 최종적으로 민치록(閔致祿: 1799-1858)의 딸이 낙점되었다.     왕실의 혼례는 육례의 절차에 따라 갖추어 진행되었다. 그해 3월 9일 청혼서를 보내는 납채(納采)를 시작으로 같은 달 11일에 예물을 보내는 납징(納徵), 17일에는 혼인날짜를 알려주는 고기(告期), 20일에는 신부를 왕비로 책봉하는 책비(責備) 의식이 거행되었다.   같은 달 21일에 왕비를 창덕궁으로 데려오는 친영(親迎)과 중희당에서 동뢰연(同牢宴)을 거행하였다. 동뢰연은 왕과 왕비가 술과 음식을 서로 나누어 먹는 의식이다.     공식적인 의식이 끝나고 다음날인 22일 아침에는 대왕대비, 왕대비, 대비에게 차례로 인사를 드리는 조현례(朝見禮)를 치렀다. 그 다음날 고종은 그동안 수고한 가례도감의 관원들에게 차등을 두어 상을 내렸다.     납채, 납징, 책비 등 각 의식이 거행될 때마다 차려진 선온상(宣?床)에는 여섯 그릇의 음식이 차려졌다. 황대구와 문어, 전복 등을 익히거나 말린 절육(折肉) 한 그릇, 익힌 전복[熟全鰒] 한 그릇, 도라지나물[??菜] 한 그릇, 배·감·진자를 비롯해 껍질 있는 잣 등 실과(實果) 한 그릇, 닭찜[鷄蒸] 한 그릇, 간장(艮醬) 한 그릇이다.     의식을 수행한 사람에게는 이 선온상과 함께 한 사람씩 한 잔의 향온주가 내려졌다. 동뢰연에서는 동뢰연상(同牢宴床)과, 좌측에 놓이는 별도의 상인 좌협(左挾), 우측에 놓은 우협(右挾), 면협(面俠) 등 각각 두 개의 상이 왕과 왕비 앞에 올려졌다. 동뢰연상에는 중박계(中朴桂, 약과와 비슷한 유밀과 종류), 홍산자(紅散子, 붉은색으로 물들은 산자), 백산자(白散子), 홍마조(紅?條), 유사마조(油沙?條), 여섯 가지 실과(六色果實, 잣, 진자, 비자, 대추, 말린밤(황율), 홍시)를 올렸다.     이 음식들은 약 12-30센티미터 높이로 쌓았다. 좌협과 우협 상차림에는 망구소(望口消), 미자(味子兒), 산자(散子) 등 과자 종류를 차렸고, 동뢰연상에 오른 음식보다는 낮게 고여 차려졌다. 이때 함께 올린 면협상에는 여섯 가지 채소(더덕[山蔘], 무[菁根], 생강(生薑), 도라지[實??], 동아(冬瓜), 미나리[水芹])를 4그릇에 나누어 담았고, 중포절(中脯折, 포오림), 대전복(大全鰒), 익힌 전복(熟全鰒), 말린문어[乾文魚], 말린 꿩[乾雉], 꿩[生雉], 어린닭[鷄兒], 계란(鷄卵), 오리[鴨子], 노루의 뒷다리[獐後脚], 중간크기의 생선[中生鮮]을 차렸다. 면협상이라고는 하나 실제 국수는 보이지 않는다.     이 외에도 동뢰의식은 거행하는 동안 고종과 명성황후는 대선상(大膳床)과 소선상(小膳床), 사방반(四方盤)·중원반(中圓盤)·과반(果盤)도 각각 받았으며, 술잔을 세 차례 받아 마시는데, 이때 미수(味數)상 역시 세 번 차례로 오르며, 각 미수상마다 여섯 그릇의 음식을 놓았다.     대왕대비, 왕대비, 대비께 아침인사를 드린 조현례의 경우 동뢰연의 과반 상차림 음식과 같았다. 문어오림[文魚折], 전복오림[全鰒折], 말린꿩오림[乾雉折], 약과(藥果), 배[生梨], 밤[實生栗], 잣(實栢子), 생강정과(生薑正果), 동아정과(冬瓜正果), 맥문동정과(天門冬正果)으로 차렸으며, 절육, 과자, 과일, 정과류 등 간식이나 다과, 안주로 이용할 수 있는 음식이 주가 되었다.  
  • 1882년(고종 19) 왕세자 순종(純宗: 1874-1926)과 순명효황후 민씨(純明孝皇后 閔氏: 1872-1904)의 가례에서 초간택, 재간택, 관례, 가례에 이르는 과정에 마련된 음식을 적은 발기가 있다. 왕세자 척(?, 훗날의 순종)의 가례를 치르기 위해 시행된 간택은 1881년(고종 18) 11월 15일에 금혼령이 내려졌고, 29일 간택일이 정해졌다. 이듬해 1882년 1월 15일에 초간택, 18일에 재간택, 26일에 삼간택이 행해졌다. 이때 세자빈으로 여은부원군(驪恩府院君) 민태호(閔台鎬: 1834-1884)의 딸이자 훗날 순명효황후가 결정되었다. 1882년 2월 21일에는 중희당(重熙堂)에서 동뢰연(同牢宴)이 베풀어졌다. 1882년(고종 19) 1월 15일부터 2월 21일까지 이루어진 왕세자 순종의 초간택, 재간택, 삼간택, 관례, 가례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에서 마련된 음식을 적은 발기가 7건이 있다. 순종의 가례 관련 발기 중 『임오 가례시 건기(壬午 嘉禮時 件記)』에는 초간택, 재간택, 삼간택에 걸쳐 올린 상차림의 유형과 음식 및 기명이 적혀 있다. 1월 15일 초간택일에는 대조전(大造殿)의 초조반(初早飯)으로 ‘의이(薏苡)와 잡탕雜湯)’이 올려졌는데, 진지(進支)는 ‘유발리(鍮鉢里)’ 즉 유기로 된 바리그릇에 담겼고, ‘탕기기명(湯器器皿)’은 ‘사기(砂器)’였다. 주담(晝啖)으로 차린 ‘왜반기상(倭盤只床)’에는 ‘면탕신설로(?湯新設爐)’와 ‘화채(花菜)’, ‘침채(沈菜)’로 ‘흑칠중반(黑漆中盤)’에 올려졌다. 1월 19일 재간택일에는 처자(處子) 4인(人)에게 ‘진지반기상(進止盤只床)’이 올려졌다. 1월 26일 삼간택일에는 간택된 처자 1인은 ‘진지(進止)’후 의대를 갖추어 입고, 나머지 처자(處子) 2인(人)에게는 ‘반기상(盤只床)’이 차려졌다. 『임오 정월 십오일 초간택시 진어상 빈상 처자상 발기』는 초간택이 실행되었을 때 왕실가족과 내빈, 그리고 간택에 참석한 처자들에게 내린 상차림의 음식내용이 적혀 있다. 어상 5상(御床五床), 자가(自家), 운현 2상(雲峴二床)은 17그릇으로 같은 종류의 수와 음식을 올렸다. 어상을 받은 대상은 고종(高宗: 재위 1863-1907), 명성황후(明成皇后: 1851-1895), 당시 대왕대비였던 신정왕후(神貞王后: 1808-1890), 당시 왕대비였던 효정왕후(孝定王后: 1831-1903)이며, 그 외 한 명은 분명하지 않다. ‘자가’는 헌종의 후궁인 순화궁(順和宮) 경빈 김씨(慶嬪 金氏: 1831-1907)이다. ‘운현 2상’은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이하응(李昰應: 1820-1898)과 그 부인인 여흥부대부인(驪興府大夫人: 1818-1898)에 올린 상을 가리킨다. 30인의 빈상(賓床)과 한성판윤(漢城判尹)과 오부관원(五部官員)에게 내린 상은 어상보다 적은 그릇수의 상을 받았다. ‘처자상(處子床)’ 즉 간택에 참석한 26명의 처자들에게 차린 상은 소반보다 다리가 짧은 왜반기(倭盤只)에 차렸으며, 음식은 일곱 그릇으로 ‘면신설로(?新設爐), 탕신설로(湯新設爐), 정과(正果), 화채(花菜), 청(淸), 개자(芥子), 초장(醋醬)’이다. 처자들에게는 진지(進支)상도 제공되었다. 재간택에 쓰인 음식내용을 적은 『임오 정월 십팔일 재간택 진어상 빈상 처자상 발기』에는 초간택 때와 달라진 점이 있다. 아기씨(阿只氏)가 받은 주물상(晝物床)과 진지상(進支床)이 새롭게 등장한 것이다. 아기씨의 주물상은 심지어 진어상과 음식 구성이 똑같다. 초간택 때 처자 26명에서 재간택 때는 7명으로 줄었다. 그런데 이 발기에 보면 처자상은 여섯 상으로 한 상이 빠진 것이다. 빠진 한 상은 바로 아기씨의 상차림이다. 아기씨는 세자빈 즉 순명효황후이다. 최종 삼간택이 이루어지기 전에 이미 세자빈이 결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 춘향이 모 이 말 듣고 이윽히 앉았더니 몽조가 있는지라 연분인 줄 짐작하고 흔연히 허락하며, “봉이 나매 황이 나고, 장군 나매 용마 나고, 남원의 춘향이 나매 이화춘풍 꽃다웁다. 향단아 주반 등대 하였느냐?” “예” 대답하고 주효를 차릴 적에 안주 등물 볼작시면 굄새도 정결하고, 대양판 가리찜 소양판 제육찜 풀풀 뛰는 숭어찜 포도동 나는 메추리 순탕에 동래 울산 대전복 대모 장도 드는 칼로 맹산군의 눈썹 체로 어슥비슥 오려놓고 염통 산적 양볶이와 춘치자명 생치다리, 적벽대접 분원기에 냉면조차 비벼놓고, 생률 숙률 잣송이며, 호도 대조 석류 유자 준시 앵도 탕기 같은 청실리를 치수 있게 괴었는데, 술병치레 볼작시면 티끌 없는 백옥병과 벽해수상 산호병과 엽락금정 오동병과 목 긴 황새병 자라병 당화병 쇄금병 소상동정 죽절병 그 가운데 천은 알안자 적동자 쇄금자를 차례로 놓았는데, 구비함도 갖을시고, 술이름을 이를진대 이적선 포도주와 안기생 자하주와 산림처사 송엽주와 과하주 방문주 천일주 백일주 금로주 팔팔 뛰는 화주 약주 그 가운데 향기로운 연엽주 골라내어, 알안자 가득 부어 청동 화로 백탄불에 냄비 냉수 끓는 가운데 알안자 둘러 불한불열 데워내어 금잔 옥잔 앵무배를 그 가운데 데웠으니, 옥경 연화 피는 꽃이 태을선녀 연엽주 띄듯, 대광보국 영의정 파초선 띄듯 둥덩실 띄워 놓고, 권주가 한 곡조에 일배일배부일배라. 이도령 이른 말이 “금야에 하는 절차 보니 관청이 아니어든 어이 그리 구비한가?”『춘향전』은 판소리계 소설로 널리 알려진 작품이다. 판소리 「춘향가」가 전승되는 과정에서 그 사설이 소설로 윤색되어 정착된 것이 판소리계 소설 『춘향전』이다. 판소리 「춘향가」는 현재까지 전승되고 있는 판소리 다섯 바탕 중 대표적인 작품이며, 소설본도 판본, 필사본, 활자본 등의 형태로 많은 이본이 전해지고 있다. 광한루에서 춘향이를 본 이몽룡은 그날 밤에 춘향의 집을 찾아간다. 춘향의 어머니 월매는 마침 청룡이 나타나는 꿈을 꾸고 이몽룡과 춘향이가 천생연분임을 확신한다. 이에 월매는 이몽룡에게 술을 겸한 음식상을 극진히 차려서 대접하는데, 그 음식상은 매우 화려했다. 위 글에는 다양한 음식이 등장하는데, 안주류만 보더라도 가리찜, 제육찜, 숭어찜, 메추리 순탕, 대전복, 염통산적, 소의 양을 볶은 요리인 양볶이, 꿩다리 요리인 생치다리, 냉면 등이 나열되어 있다. 이 중에서 ‘가리찜’은 갈비찜을 말한다. 소나 돼지 따위의 갈비를 토막 쳐서 양념하여 국물을 붓고 삶거나 쪄서 만들어 먹는다.
  • 『소문사설(?聞事說』(1740년경)에서 가마보곶(可麻甫串)이라는 음식을 소개하고 있는데 이는 일본의 어묵인 가마보코(蒲?, かまぼこ)와 음이 같도록 한자로 표기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소문사설의 가마보곶과 일본음식인 가마보코는 재료나 조리법이 상이하여 같은 음식으로 볼 수 없다. 가마보코는 생선살을 갈아 모양을 빚은 뒤 익힌 음식이지만 가마보곶은 생선살을 갈지 않고 저며서 만드는데, 생선살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소고기, 돼지고기, 버섯, 해삼 등으로 만든 소와 저민 생선살을 층층이 쌓은 뒤 말아서 녹말가루를 씌우고 끓는 물에 익혀 만든다.『소문사설』에 따르면 가마보곶을 만들 때 사용하는 생선으로는 숭어, 농어, 도미 등이 있다. 또 일본의 가마보코와 달리 “소고기, 돼지고기, 목이버섯, 석이버섯, 표고버섯, 해삼 등의 여러 가지 재료와 파, 고추, 미나리 등 여러 가지 양념”으로 소를 만들어 넣는데, 생선살과 소를 층층이 쌓아 두루마리처럼 말아 녹말을 입혀 끓는 물에 익힌다. 익힌 가마보곶은 칼로 썰어서 고추장을 곁들여 먹는데, 이때 생선살과 소가 어우러진 모습이 태극모양 같다고 하였다. 유사한 음식으로는 『조선요리법(朝鮮料理法)』에 소개된 태극선이 있다.이렇게 만든 가마보곶은 어묵이라기보다는 어선에 가깝다. 어선은 생선포를 넓게 펴고 달걀, 오이, 당근, 표고버섯 등의 소를 넣은 뒤 말아서 찐 음식이다. 어선은 궁중음식, 혹은 혼례음식으로 분류되며 한식조리기능사 실기 메뉴에도 포함되어 있다(2017년 기준).
  • 조선시대 세조(世祖: 재위 1455-1468)는 1459년 명나라에 강순(康純: 1390-1468) 등을 사은사(謝恩使)로 보냈다. 이때 명나라 황태자에게도 예물과 함께 감사를 표하는 글[箋文]을 올렸는데, 이 글에서 세조는 “신은 삼가 마땅히 길이 접역(?域)의 울타리[藩籬]가 되어 항상 용루(龍樓, 황태자의 궁전)에 거듭 축수(祝壽)를 드리겠습니다”라고 하였다.(『세조실록(世祖實錄)』 세조 5년 3월 17일 기사) 여기에서 ‘접역’이란 조선을 지칭하는 말로서, ‘접허(?墟)’, ‘접강(?疆)’이라고도 하였는데 우리나라에서 가자미가 많이 잡힌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지금도 가자미식해는 일부 지역의 향토음식으로 전해지고 있지만, 특히 함경도의 가자미식해는 유명했다. 1978년부터 1980년까지 조사한 『한국민속종합조사보고서-향토음식 편』에도 함경도의 향토음식 가운데 함흥의 명산물로 가자미 식해젓이 나온다. 이에 따르면, 가자미식해는 얼큰하게 매우면서도 달착지근하고 산뜻한 맛이 일품인데, 12월부터 3월 초에 나는 가자미로 담아야 맛이 좋다고 한다. 참가자미로 담그면 더욱 좋은데, 만드는 법을 보면, 깨끗이 씻어서 물기를 뺀 가자미를 항아리에다 소금과 켜켜이 넣고 열흘쯤 절였다가 가자미를 꺼낸다. 먹기 좋게 자른 가자미에 좁쌀밥과 고춧가루를 넣고 버무려 항아리에서 나흘간 두었다가, 여기에 굵직하게 채 썬 무와 고춧가루와 버무린 것을 넣은 후 열흘 쯤 지나면 먹으라고 했다.이공(李公: ?-?)의 『사류박해(事類博解)』를 보면, 가자미를 한자어로는 ‘加佐味(가좌미)’, ‘?魚(겸어)’, ‘?魚(개어)’, ‘三魚(삼어)’, ‘比目魚(비목어)’, ‘鏡子魚(경자어)’라고 했고, 서유구(徐有?: 1764-1845)는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전어지(佃魚志)」에서 ‘?’(접)은 ‘가?미’, ‘鞋底魚(혜저어)’, ‘比目魚(비목어)’, ‘?(개)’, ‘?(허)’, ‘?(겸)’, ‘版魚(판어)’, ‘奴?魚(노교어)’, ‘婢?魚(비사어)’라고도 한다고 소개하였다.이런 가자미로는 가자미자반, 가자미찌개, 가자미구이, 가자미회, 가자미젓, 가자미국, 가자미전유어, 가자미식해(食?) 등을 만들어 먹었다. 이 가운데 가자미식해를 보면, 이규경(李圭景: 1788-1863)이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서 ‘생선식해[諸魚食?]’ 만드는 법을 소개하면서 가자미도 포함하였다. 그에 따르면, 식해는 바닷가 사람들이 많이 만들어 먹는데, 먼저 흰 멥쌀밥에 엿기름과 누룩가루를 넣고 잘 섞어 몇 종지의 물도 넣어 발효시킨다. 그런 다음 가자미를 꺼내 물기를 제거하고 햇볕과 바람에 잘 말렸다가 잘게 썰어서 소금과 버무려 두었다가 익은 다음에 먹는다.지금도 가자미식해는 일부 지역의 향토음식으로 전해지고 있지만, 특히 함경도의 가자미식해는 유명했다. 1978년부터 1980년까지 조사한 『한국민속종합조사보고서-향토음식 편』에도 함경도의 향토음식 가운데 함흥의 명산물로 가자미 식해젓이 나온다. 이에 따르면, 가자미식해는 얼큰하게 매우면서도 달착지근하고 산뜻한 맛이 일품인데, 12월부터 3월 초에 나는 가자미로 담아야 맛이 좋다고 한다. 참가자미로 담그면 더욱 좋은데, 만드는 법을 보면, 깨끗이 씻어서 물기를 뺀 가자미를 항아리에다 소금과 켜켜이 넣고 열흘쯤 절였다가 가자미를 꺼낸다. 먹기 좋게 자른 가자미에 좁쌀밥과 고춧가루를 넣고 버무려 항아리에서 나흘간 두었다가, 여기에 굵직하게 채 썬 무와 고춧가루와 버무린 것을 넣은 후 열흘 쯤 지나면 먹으라고 했다.? 
  • 가지는 한자로 ‘茄子(가자)’ 또는 ‘茄(가)’라고 하는데, 삼국시대에도 이미 먹었던 채소이다. 현재는 주로 물가지[水茄]를 먹고 있지만, 조선시대에는 산가지[山茄]로도 음식을 만들어 먹었다. 조선 정조(正祖) 대의 문필가였던 이옥(李鈺: 1760-1815)의 『백운필(白雲筆)』을 보면, 산가지는 생으로 먹을 수 없고 국을 끓이거나 구워서 먹어야 하며 물가지는 생으로 먹을 수 있는데 굴[石花]에 섞어 먹으면 아주 맛있다고 하였다. 즉, 산가지는 익혀 먹고 물가지는 익혀도 먹지만 가지김치나 절임 같이 가열하지 않은 가지 요리를 만들었던 것이다.홍만선(洪萬選: 1643-1715)의 『산림경제(山林經濟)』에는 물가지를 이용한 음식과 산가지를 이용한 음식의 조리법이 보인다. 여름철에 담그는 가지김치[夏月?茄?]에는 흠 없는 물가지로 만들고, 가지찜[茄子爛法]은 물가지 말고 큰 가지를 쓰는데 세 쪽으로 가른 후 가지 속을 긁어내고 그 안에 양념한 육고기와 밀가루를 섞은 소를 채워 장물에 삶아서 만들라고 했다. 또한 이옥은 생가지는 굴[石花]과 섞어 먹으면 좋다고 하였는데, 이용기(李用基: 1870-1933)의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朝鮮無雙新式料理製法)』에는 굴이 아니라 굴젓[石花?]을 새로 딴 가지와 함께 먹으면 알맞다는 내용이 보인다.한편 『백운필』에서는 당시 조선에는 자줏빛 가지, 흰 가지, 푸른 가지, 누런 가지, 연붉은 가지가 있었다고 했는데, 『중종실록(中宗實錄)』에도 푸른 가지[靑茄]가 나온다. 1526년 중종(中宗: 재위 1506-1544)에게 푸른 가지를 바쳤던 아기동(阿只同)이라는 나이든 아낙이 2년 후인 1528년 다시 푸른 가지와 수박을 바치러 왔지만, 말을 잘 하고 그대로 돌려보냈다는 것이다. 가지와 수박을 바치는 그의 정성은 지극하나, 이번에도 받으면 앞으로 이 일을 따라하는 사람들이 이어져 폐단이 생길 수 있다는 이유였다(중종 23년 9월 19일 기사).가지는 조선시대 사람들이 상당히 즐겨 먹던 채소로서, 가지를 심어 가지선, 가지김치, 가지찜, 가지장아찌, 가지누르미, 가지나물, 가지전, 가지국, 가지볶음 등 다양한 음식을 만들었다. 또 가지를 되도록 오래 신선하게 먹을 수 있는 방법으로 조선 초기 전순의(全循義: ?-?)의 『산가요록(山家要錄)』에는 수확한 가지를 항아리에 깨끗한 재와 함께 켜켜이 넣어두는 방법을 소개하였다.
  • 궁중 연회나 제사에는 중국과 일본에서 건너온 다양한 사탕[砂糖]이 오른다. 사탕은 ‘각색당(各色糖)’, ‘각색당당(各色唐糖)’, ‘각색왜당(各色倭糖)’이라는 명칭으로 진찬의궤(進饌儀軌), 진연의궤(進宴儀軌) 등 궁중 연회를 기록한 의궤에 나온다.1887년(고종 24) 연회에 오른 각색당(各色糖)의 종류는 대사당(大砂糖), 귤병(橘餠), 팔보당(八寶糖), 오화당(五花糖), 진자당(榛子糖), 밀조(蜜棗), 금전병(金箋餠), 옥춘당(玉春糖), 빙당(?糖), 건포도(乾葡萄), 청매당(靑梅糖), 이포(梨脯), 인삼당(人蔘糖), 추이당(推耳糖), 어과자(御菓子), 수옥당(水玉糖), 설당(雪糖)이다. 팔보당, 오화당, 빙당, 옥춘당, 추이당, 수옥당과 같이 단단한 사탕류도 있지만 건포도처럼 말린 과일도 사탕류에 속하였다. 귤을 꿀이나 사탕에 졸여 만든 귤병, 대추를 꿀에 조린 밀조, 배를 사탕에 졸여서 포처럼 말린 이포와 같이 사탕이 아닌 꿀이나 엿에 졸인 과실을 사탕류에 포함하였다. 어과자(御菓子)는 일본어로 ‘おかし(오카시)’로 일본 과자이다. 갑(匣)이라는 분량 단위를 쓴 것으로 보아 상자에 담겨 있었던 듯하다. 잔치마다 사탕종류를 한 그릇에 담거나 여러 그릇에 나누어 담기도 한다. 1892년 궁중연회에서는 ‘각색당당(各色唐糖)’, ‘각색왜당(各色倭糖)’, 즉 중국에서 온 사탕과 일본에서 온 사탕으로 나누어 담았다. 각색당당에는 밀조, 팔보당, 금전탕, 추이당, 이포, 진자당, 청매당, 인삼당, 오화당, 빙당, 설당이며, 이 사탕종류는 중국에서 건너온 것이다. 일본 사탕류를 담은 각색왜당에는 옥춘당, 수옥당, 어과자 등이 포함되었다.그 밖에 잔치에 오른 사탕류로는 어엽자설당(於葉子雪糖), 밀당(蜜糖), 양과자(洋菓子), 회회포(回回葡)가 있다. 회회포의 ‘회회’는 아라비아를 말하며, 중국을 통해 아라비아산 건포도로 여겨진다. 서양, 중동지역에서 온 사탕이나 과자도 조선왕실 연회에 올랐다.
  • 각색병은 고임상의 음식 중 가장 높게 고이는 궁중연회에서 중요한 음식이다. 편편한 시루떡을 밑에 깔고 그 위에 여러 가지 색을 들여 작게 모양 낸 절편, 조악, 단자 등 웃기떡을 위에 올려 다양한 종류의 떡을 한 그릇에 담아 고인다. 궁중연회에서 왕과 왕족에게 많은 가짓수의 음식을 높이 고인 고임상을 올린다. 고임은 음식에 따라 높이가 다른데, 이 중 가장 높이 고이는 음식은 떡이다. 궁중에서는 고임떡을 여러 가지의 떡이라는 의미로 ‘각색병(各色餠)’이라고 한다. 다양한 종류의 떡을 한 그릇에 고여 연회상에 차린 것이다. 1795년 정조의 화성행차를 기록한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에 보면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에 차린 각색병은 다음과 같다. 백미병(白米餠, 멥쌀떡), 점미병(粘米餠, 찹쌀떡), 삭병(?餠), 밀설기(蜜雪只), 석이병(石耳餠, 석이떡), 각색절편(各色切餠), 각색주악(各色助岳), 각색사증병(各色沙蒸餠, 산승), 각색단자병(各色團子餠)의 아홉 가지 떡 종류를 1척 5촌(약 45센티미터) 높이로 고인다.백미병은 콩과 대추, 밤이 들어간 메시루떡이고, 점미병은 대추, 밤, 말린 감이 들어가고 녹두고물을 한 찰시루떡이다. 삭병은 검정콩과 대추, 밤과 꿀이 들어간 찰시루떡이다. 밀설기는 꿀이 들어간 멥쌀과 찹쌀이 섞인 백설기떡이며, 석이병(石耳餠)은 석이, 대추, 밤, 말린밤, 잣, 꿀이 들어간 석이떡이다.멥쌀가루에 연지, 치자, 쑥, 김 등 여러 가지 색을 들여 쪄서 친 떡이 절편이고, 찹쌀가루에 공기, 치자, 쑥, 김 등으로 색을 들여 작은 만두처럼 빚어 기름에 지진 것이 주악이다. 승검초 등 색 들여 찹쌀 반죽하여 셋이나 네발로 빚어 기름에 지진 떡이 사증병이다. 석이버섯, 대추, 밤, 쑥 등으로 색을 낸 떡이 단자병이다. 각색병은 백미병, 점미병, 삭병, 밀설기, 석이병 등 편편한 밑받침이 되는 시루떡 종류를 먼저 고이고, 그 위에 절편, 주악, 사증병, 단자병 등 색을 들여 작게 만든 웃기떡을 올리는 것이다.연회의 규모나 상차림의 형태에 따라 각색병은 여러 떡 종류를 한 그릇에 같이 담기도 하고, 여러 그릇에 나누어 담기도 하였다. 1828년의 궁중연회를 기록한 『무자 진작의궤([戊子]進爵儀軌)』의 각색병은 한 그릇이 아닌 각색경증병(各色粳甑餠, 메시루떡 고임), 각색점증병(各色粘甑餠, 찰시루떡 고임), 각색주악·화전·양색산승(各色助岳花煎及兩色山?)으로 나누어 여러 그릇에 담기도 했다.
  • 각선(却膳)은 조선시대에 왕이 자신을 위해 차려놓은 수랏상을 입맛이 없다든가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 하여 물리치고 먹지 않는 일을 말한다. 때로는 아예 음식을 올리지 않도록 하는 ‘철선(撤膳)’과 혼용되기도 했다. 각선은 특히 왕이 신하들과 어떤 문제로 갈등을 빚을 때나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고자 할 때에도 이용되었다. 예를 들면, 세종(世宗: 재위 1418-1450)은 1448년 경복궁 안에 내불당(內佛堂)을 설치하는 문제로, 영조(英祖: 1724-1776)는 탕평책(蕩平策)을 실시하는 문제로 각선한 일이 있다.『세종실록(世宗實錄)』에 따르면, 1448년(세종 30) 7월, 세종은 문소전 서북(西北)에 불당을 설치하라고 명하였다. 이에 대하여 도승지(都承旨) 이사철(李思哲)을 비롯하여 승정원의 관리들이 궐내에 불당을 설치하는 것은 불가하며 더구나 문소전(文昭殿) 옆에 두어 승려가 머물게 하는 것은 더욱 안 된다며 반대하였으나, 세종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이어 영의정 황희를 포함한 정승들, 육조판서, 사헌부와 사간원, 집현전, 심지어는 성균관 유생들은 학업을 폐하면서까지 불당 설치가 불가하다고 명을 거두시라고 연일 간청하였다.(『세종실록』 세종 30년 7월 17·18·19·20·21·22·23·24·25·26·27·28·29일, 8월 2·3일 기사) 유교를 기반으로 성립한 조선에서 하물며 궐내에 불당을 설치하는 일은 나라를 다스리는 데 조금도 보탬이 되지 않으며, 태조(太祖: 재위 1392-1398)와 태종(太宗: 재위 1400-1418)의 뜻에도 어긋나는 일이라는 주장이었다.내불당 설치에 대한 신하들의 격렬한 반대가 계속되자, 세종은 아예 아들 임영대군(臨瀛大君: 1420-1469)의 집으로 옮겨갔다. 사실 세종 자신도 불당을 지으라고 명령할 때에 틀림없이 반대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는 예상은 하였다. 하지만 적당히 하다가 그만둘 줄 알았는데, 모두가 세종이 명을 거두도록 극진하게 간하니 크게 기분이 상했기 때문이다. 불쾌한 마음에 여러 번 수랏상을 물리고[撤膳], 왕위를 내놓겠다는 뜻을 살짝 비쳤는데도, 신하들의 청이 이어지자 궁에서 나가 아들 집에 머문 것이다. 불당 설치에 대한 세종의 뜻이 이토록 완강하니, 신하들도 더 이상 감히 말을 꺼내지 못하였다.(세종 30년 8월 4일 기사) 실록에는 ‘철선’이라 기록되어 있으나 사실상 각선을 행한 세종은 결국 자신이 원하는 대로 내불당을 설치하였다.한편 영조는 1737년 당파를 없애고 탕평책을 펴려고 했으나 신하들이 따라주지 않고, 임금인 자신을 우습게 본다면서 감선(減膳)과 각선(却膳)을 행하였다. 그때마다 신하들이 몸을 상할까 염려하며 음식을 드시라고 거듭 상소하였지만 영조는 조정의 신하들이 나를 이 지경이 되게 만들었다면서 각선을 멈추지 않았다.(『영조실록』 영조 13년 8월 10·11일 기사)이러한 영조의 각선에 대해 이석표(李錫杓: 1704-?)는 미봉책이라면서, 임금께서 그렇게 밥을 먹지 않고 각선을 한다 해도 당파는 없어지지 않으니 시비를 분명히 하라는 상소를 올렸다. 신하들도 묵은 감정을 모두 푼 것처럼 겉으로는 조정에 나와 잘 지내는 듯 굴지만, 속으로는 서로 공격할 기회만 엿보고 있으니 왕이 신하들에게 기만당하고 있다는 주장이었다. 그런데도 전하는 날마다 각선하고 술을 내리는 방책으로 당파를 제거하려 하니, 이러한 방법은 별 도움도 되지 않으면서 전하의 위엄만 손상될 뿐이라며 개탄스럽다고 아뢰었다. 그보다는 신하들이 두려워하며 복종하도록 분명하게 시비를 세우고 벌을 준다면 탕평의 기쁨을 누릴 수 있으리라고 건의하였다(『영조실록』 영조 13년 10월 14일 기사).이석표의 말처럼 음식을 거부하고 굶는 행위는 왕의 체모를 떨어뜨리는 일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에 대해 영조는 옛 사첩(史牒)에도 나오지 않는 각선을 행한 것은 지나친 행동이지만, 자신이 오죽 고심스러웠으면 그랬겠느냐는 입장이었다(『영조실록』 영조 14년 1월 4일 기사).
  • 아배요 아배요내 눈이 티눈인 걸아배도 알지러요.등잔불도 없는 제삿상에축문이 당한기요.눌러 눌러소금에 밥이나마 많이 묵고 가이소.윤사월 보릿고개아배도 알지러요.간고등어 한손이믄아배 소원 풀어드리련만저승길 배고플라요소금에 밥이나마 많이 묵고 묵고 가이소.여보게 만술 아비니 정성이 엄첩다.이승 저승 다 다녀도인정보다 귀한 것 있을락꼬,망령도 응감하여, 되돌아가는 저승길에니 정성 느껴느껴 세상에는 굵은 밤이슬이 온다.박목월(朴木月: 1916-1978)의 시집 『경상도의 가랑잎』(1968)에 수록된 작품이다. 박목월은 초기에 향토적 서정성을 바탕으로 민요조를 개성 있게 수용하여 재창조한 시인으로 평가받았다. 그러나 중기 이후 서민들의 생활현장과 다채로운 삶의 국면에 관심을 가지면서 시세계의 변화를 보였고, 말년에는 존재의 문제를 탐구하는 지적인 성찰의 자세를 보였다. 1939년 <문장>지에 「길처럼」, 「그것은 연륜이다」, 「산그늘」 등이 추천되어 시단에 등단했다. 한양대 국문학과 교수로 있던 1978년 3월 고혈압으로 타계했다. 시집으로 『청록집』(3인시집), 『산도화』, 『난·기타』, 『청담(晴曇)』, 『경상도의 가랑잎』, 『무순(無順)』 등이 있으며, 수필집으로 『보라빛 소묘』, 『밤에 쓴 인생론』 등이 있다.이 시는 현세적 삶의 차원을 넘어서서 이승과 저승을 관통하여 생자와 망자 사이에 오가는 인정의 교감을 다룬 작품이다. 경상도 방언으로 표상되는 토속적 삶에 관심을 기울인 박목월 중기 시의 특징이 잘 드러난 작품이다. 이 시의 경상도 방언은 가난한 산골 생활의 현장감을 그대로 살려내면서 생자와 망자 사이에 이루어지는 정감의 교류를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이 시에서 간고등어는 아버지의 제사상에 소금과 밥밖에 올려놓지 못한 가난한 만술 아비의 슬픔을 부각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