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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으로 보는 한글 창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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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창제와 반포를 기념하는 한글날이 며칠 앞으로 다가왔다. 올해로 576돌을 맞이한 한글은 독창성과 과학적인 원리 그리고 뚜렷한 창제의 목적 등 세계사적으로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훌륭한 우리의 문자다. 그런데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던 한글 창제에 관한 상식과는 다른 이야기가 논란의 불씨를 일으켰다. 한글 창제의 숨은 이야기를 다룬 영화 <나랏말싸미>는 호화 캐스팅에도 불구하고 승려인 신미대사가 한글 창제의 배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내용으로 인해 큰 홍역을 치렀다. 극장을 찾은 관객은 물론 영화를 감상하지 않은 사람들조차도 “역사 왜곡이 아니냐”라며 불만을 내비쳤기 때문. 영화를 통해 이슈가 된 한글 창제에 관한 미스터리는 여러 가지가 있으나 가장 중심이 되는 논란은 세 가지였다.
하단내용참조_1
조선왕조실록 한글 창제 이야기 1
신미대사가 한글창제를 주도했는가?
결론부터 말하면 신미대사가 한글 창제를 주도했다는 내용은 전적으로 영화적 상상력에 기반한 극적 장치라고 할 수 있다. 많은 사학자와 언어학자 등 전문가들 역시 이에 대해 사실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영화 속에서 여러 언어에 능한 인물로 등장하는 신미대사로 인해 한글이 산스크리트어의 영향을 받았음을 암시하는 장면들이 등장하는데, 산스크리트어의 영향은 국내외 학자들에 의해서도 제기된 바 있는 사실이기는 하다. 또한 세종이 훈민정음을 만드는 과정에서 장남(훗날의 문종)과 딸인 정의공주를 비롯해 수양, 안평대군 등 친인척의 도움을 받았다는 기록도 있다. 하지만 도움을 받았다 하더라도 한글창제를 주도한 것은 세종이라는 것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는 게 학계의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아래와 같이 세종실록에는 세종임금이 직접 한글을 창제했다고 못 박고 있다.
이달에 임금이 친히 언문(諺文) 28자(字)를 지었는데, 그 글자가 옛 전자(篆字)를 모방하고, 초성(初聲)·중성(中聲)·종성(終聲)으로 나누어 합한 연후에야 글자를 이루었다. 무릇 문자(文字)에 관한 것과 이어(俚語)에 관한 것을 모두 쓸 수 있고, 글자는 비록 간단하고 요약하지마는 전환(轉換)하는 것이 무궁하니, 이것을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고 일렀다.” (세종실록 102권, 세종 25년 12월 30일 경술 2번째 기사) “훈민정음을 창제하다”(세종실록 102권) ▶조선왕조실록 자세히 보기 링크 :http://sillok.history.go.kr/id/kda_12512030_002
하단내용참조_2
조선왕조실록 한글 창제 이야기 2
영화 속 신미대사는 실존인물인가?
신미대사는 조선왕조 실록에 등장하는 실존인물이다. 그는 1403년 지금의 충북 영동에서 출생했으며, 출가하기 전 속세에서는 김수성(金守省)이라는 이름을 사용했고, 그의 동생 김수온(金守溫, 1410~1481)은 세종연간에 집현전에서 벼슬을 하기도 했다. 신미대사의 생몰연도는 부정확하지만 1403년에 태어나 1480년대까지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므로 제4대 임금인 세종의 재위기간(1418~1450)과도 겹친다. 또한 세종실록과 문종실록에도 그의 존재가 몇 차례 언급되었으므로 그가 실존인물이라는 사실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고 보아야 한다. 세종실록 112권에는 신미대사를 가리켜 간승(奸僧)이라는 부정적인 표현을 사용했는데 이는 조선의 숭유억불 기조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세종실록 112권, 세종 28년 5월 27일 갑오 2번째 기사) 물론 실록 어디에도 신미대사가 한글창제에 관여했다는 내용은 없다. “승도들을 모아 경을 대자암에 이전하다”(세종실록 112권) ▶조선왕조실록 자세히 보기 링크 : http://sillok.history.go.kr/id/kda_12805027_002
하단내용참조_3
조선왕조실록 한글 창제 이야기 3
집현전 학사들은 한글 창제를 반대했을까?
영화 속에서는 집현전 대제학 정인지까지 한글 창제에 반대하고 나서는 장면이 나온다. 집현전 학자들 모두가 새로운 글자를 만드는 일에 반대했던 것은 아니지만 당시 사회적 현실로 보아 한글 창제가 순탄치는 않았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중국에 대한 사대가 극에 달했던 조선시대에 그 목적이야 어쨌건 간에 한자를 부정하는 문자를 만든다는 것 자체가 사대부들의 원성을 샀던 것이다. 특히 1444년, 이른바 갑자상소(세종실록 103권, 세종 26년 2월 20일 경자 1번째 기사)라고 불리는 최만리의 한글 창제 반대 상소는 그러한 사회상을 반영하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집현전 부제학이던 최만리를 비롯해 직제학 신석조, 직전 김문, 응교 정창손 등의 거듭된 반대에 분노한 세종은 이들 중 정창손을 파직시키는 처분을 내리기도 했다. 극중에서 한글 창제를 반대했던 정인지는 현실에서는 세종의 명을 받아 훗날 한글 창제의 목적, 발음과 쓰는 법 그리고 원리를 수록한 ‘훈민정음 해례본’을 집필한다.“집현전 부제학 최만리 등이 언문 제작의 부당함을 아뢰다”(세종실록 103권) ▶조선왕조실록 자세히 보기 링크 :http://sillok.history.go.kr/id/kda_12602020_001
이처럼 영화 <나랏말싸미>에서 묘사된 한글 창제에 대한 이야기들은 일부는 틀리고 또 일부는 맞는 부분도 있다. 물론 신미대사가 한글 창제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는 점은 어디까지나 영화적 상상력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다. 반면 실록이 임금 중심으로 쓰인 사료임을 감안하더라도, 주변의 수많은 반대를 물리치고 한글 창제를 주도했던 인물은 분명 세종대왕이라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영화 <나랏말싸미>로 인해 이슈가 된 한글 창제의 진실에 관한 논란은 한글을 통해 쓰고 말하며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한글에 대한 고마움을 일깨우는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온 백성을 이롭게 하려던 한글 창제의 목적과 원리를 통해 세종대왕이 우리 민족에게 선물한 유일무이한 글자 한글의 가치를 다시금 반추해 보자. ▶국립한글박물관 ‘한글의 큰 스승’ 최태성 강사님 인터뷰 https://www.youtube.com/watch?v=vRBXl93UQy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