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별 표준영정

신개, 문희공 (文僖公)
1374 (공민왕 23) ~ 1446 (세종 28)

 조선 초기의 문신, 자는 자격(字格), 호는 인재(寅齎), 본관은 평산(平山)·고려조에서 수문전 대제학(修文殿大提學)을 지낸 신집(申輯)의 손자, 종부시령(宗簿寺令)을 지낸 부친 안(晏)은 고려가 망하자 평산의 황의산에 들어가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지켰다.

 그는 나면서부터 기질이 청수(淸粹)하고 용모가 단의(端毅)하였으며 외가인 원씨의 양육을 받고 자랐다. 행동거지(擧止)가 비범하고 성인(成人)과 같았다. 1390년(공양왕 2) 17세에 생원·진사 양시(兩試)의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393년(태조 2)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여 검열(檢閱)로 발탁되었다. 당시 태조가 실록을 보려고 하자 그 불가함을 강력히 논하였다. 이를 계기로 그 후에도 자주 실록 열람을 원하는 임금들에게 간(諫)하는 신하들의 좋은 모범이 되었다. 이듬해 태조가 한양으로 천도함에 따라 한성 정릉동으로 이거했다. 1395년 한림(翰林)을 선수(選授), 1400년(정종 2) 사헌부감찰, 이어 감찰·문하습유(門下拾遺)·좌정언·형조좌랑·호조좌랑을 거쳐 충청도도사로 나갔다가 다시 헌납·이조정랑·사인(舍人)·예문관제학·판승문원사(判承文院事) 등을 역임하고, 1413년(태종 13) 우사간대부(右司諫大夫)로 발탁되는 동시에 춘추관 편수관·지제교(知製敎)를 겸임하였다.


그는 간관(諫官)으로 있을 때 의정부 서사제도(署事制度)의 폐지를 주장했고 정부 각 대신의 비리 등을 기탄없이 거론하였다. 그 뒤 1414년 예조참의·병조참의·충청도관찰사·한성부윤을 역임하고 1417년에 공조참판을 거쳐 공조판서에 올랐으며, 이 해에 천추사(千秋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세종 즉위 후 전라도·경상도·황해도의 도관찰사(都觀察使)를 역임하고 형조참판(刑曹參判)·진주목사·우군총제·좌군총제·예문관대제학·전라도관찰사·중군도총제(中軍都摠制)·대사헌 등을 역임하였다. 1433년(세종 15)에는 야인이 자주 변경을 침입하여 큰 피해를 입히자 정벌을 강력히 주장하여 이들을 토벌하도록 하였다. 이 해에 이조판서가 되고, 이듬해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어 형조판서를 거쳐 우참찬(右參贊)에 올라 지춘추관사를 겸임하면서 《고려사》 편찬에 참여하였고, 1436년에 좌찬성(左贊成)을 지낸 후 세자이사(世子貳師)·집현전대제학을 겸임하였다. 그는 1439(세종 21)에 우의정에 임명되자 사퇴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은 내 뜻이 아니라, 곧 태종(太宗)의 유교(遺敎)이다.’ 하였다. 1442년에는 감춘추관사로 권제 등과 더불어 편찬한 《고려사》를 완성하였고, 공법(貢法)·축성(築城) 등에 있어서 백성들에게 불편한 것은 이를 건의하여 시정하도록 하였다. 1444년(세종 26)에 궤장을 하사받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으며, 1445년(세종 27)에 좌의정에 승진되었다가 이듬해에 이르러 졸(卒)하니, 나이 73세이었다. 문희(文僖)란 시호(諡號)를 내렸으며, 세종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되었다. 묘소는 황해도 평산군 세곡면 광평리에 있으며 단소는 음성군 원남면 하당리에 있다. 저서로는 ≪인재문집≫《寅齋文集》이 있다.


[영정개요]
-표준영정 지정년도 : 2013
-제작 작가 : 박서림
-영정크기 : 180×120(가로X세로cm표시)
-소장지 및 소장인 : 양졸재 평산신씨 문희공파종중 (충청북도 음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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