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별 표준영정

성왕 (聖王)
?~554(성왕 32), 백제 제26대왕

 무녕왕의 아들이며, 이름은 명농이다. 《양서 梁書》 백제전에는 이름을 명(明)이라 하였고, 《일본서기》에는 명왕(明王) 또는 성명왕(聖明王)으로 표기되어 있다. 《삼국사기》에는 “지식이 영매(英邁)하고 결단력이 있어 나라사람이 성왕으로 칭하였다.”라 하였고 《일본서기》에는 “천도지리에 통달하여 그 이름이 사방에 퍼졌다.”라고 찬양하고 있어서 그의 인물 됨됨이가 비범하였음을 알 수 있다.


 동성왕, 무녕왕이 웅진 초기의 정치적 불안정을 수습하면서 추진해 온 왕권강화 정책을 계승하여 538년(성왕 16)에 사비(泗?)로의 천도를 단행하였다. 성왕의 사비천도는 고구려의 남침이라고 하는 외부세력의 강요에 의하여 행해졌던 웅진천도와는 달리 성왕의 의도적인 계획 하에 단행된 것이다. 따라서 이 사비천도는 왕권과 국력강화 정책의 마지막 마무리 작업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사비천도에는 사비지역의 토착 신진세력이었던 사씨(沙氏, 沙宅氏)의 정치적 지지가 강하게 작용하였다. 사비천도 후 국호를 일시 '남부여(南扶餘)'라 개칭하여 부여족으로서의 전통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중국의 양조(梁朝)와 빈번한 교류를 가지면서 모시박사(毛詩博士), 공장(工匠), 화사(畵師) 등을 초빙하고 열반등경의(涅槃等經義)를 수입하여 백제문화의 질적 수준을 향상시키는 데 크게 힘썼다.


 또한 성왕은 인도로부터 범어(梵語)로 된 5부율(五部律)을 가지고 온 겸익(謙益)을 우대하여 고승들을 모아 5부율을 번역시키고 아울러 담욱(曇旭), 혜인(惠仁) 등이 지은 율소(律疏) 30권에 친히 비담신율서(毗曇新律序)를 써서 백제신율을 성립시켰다. 성왕의 이러한 계율의 장려는 불교 교단의 정비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달솔(達率) 노리사치계(怒唎思致契) 등을 일본에 파송하여 석가불금동상 1구, 번개(幡蓋)약간, 경론(經論)약간권을 보내어 줌으로써 일본에 불교를 전파하게 되었다. 이밖에도 성왕은 의박사, 역박사 등의 전문가와 기술자를 교대로 파견함으로써 일본에 대한 선진문물의 전수자로서의 구실을 하였다.


 이와 더불어 사비천도를 전후하여 웅진시대 이래 행해졌던 내외관제를 정비하여 지배체제의 정비와 통치 질서를 확립하였다. 중앙관제로는 1품 좌평(佐平)에서 16품 극우(克虞)에 이르는 16관등제와 전내부(前內部) 등 내관 12부와 사군부(司軍部) 등 외관 10부로 된 22부제가 정비되었다. 또 왕도의 통치조직으로서는 수도를 상부, 전부, 중부, 하부, 후부의 5부로 구획하고 5부 밑에 5항(五巷)을 둔 5부 5항제를 정비하였다. 그리고 지방통치조직으로는 종래의 담로제(?魯制)를 개편하여 전국을 동방, 서방, 남방, 북방, 중방의 5방(五方)으로 나누고 그 밑에 7∼10개의 군을 두는 5방, 군, 성(현)제를 정비하였다. 이와 같이 중앙관제와 지방의 통치조직을 정비함으로써 성왕은 정치운영에 있어서 귀족회의체의 정치적 발언권을 약화시켜 왕권 중심의 정치 운영 체제를 확립할 수 있었다.


 그리고 성왕은 국제관계에도 힘을 기울여 전대부터 유지되어온 신라와의 동맹관계를 그대로 지속함으로써 고구려의 남진압력에 대항하여 나갔다. 그리고 양(梁) 및 왜(倭)와의 외교관계를 유지하면서 무역과 이에 따르는 문화교류를 적극적으로 추진하면서 백제의 국제적 지위를 높였다. 한편, 성왕은 숙원의 과제라고 할 수 있는 고구려에게 빼앗긴 한강유역 탈환 작업에 나섰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그는 551년에 백제군을 주축으로 하여 신라군과 가야군으로 이루어진 연합군을 일으켰다. 이 연합군은 북진하여 백제군이 먼저 고구려의 남평양(南平壤:지금의 서울)을 공격하여 격파함으로써 기선을 제압하여 고구려군을 패주시켰다. 그 결과 백제는 한강 하류의 6군을 회복하였고 신라는 한강상류의 10군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신라의 진흥왕은 나제동맹 관계를 무시한 채 한강 하류유역을 탈취하고자 당시 남북으로부터 군사적 위협에 처하여 있던 고구려와 밀약을 맺고 553년에 군사를 돌이켜 백제를 공격하여 옴으로 백제는 한강 하류유역을 신라에 빼앗기게 되었다. 신라의 공격으로 백제의 실지 회복이 수포로 돌아가게 되어 성왕은 554년에 비전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신라에 보복을 하기 위한 군사를 일으켰다. 이 신라 보복군에는 가야의 원군도 합세하였다. 백제의 이와 같은 군사동원으로 양국 간의 대결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이때 양국의 싸움은 관산성(管山城)에서 그 절정을 이루었다. 이 싸움에서 초기에 우세를 보였던 백제는 성왕이 구천(狗川)지역에서 신라복병의 기습공격을 받아 전사함으로써 대패하고 말았다. 이 전쟁에서 백제는 왕을 비롯하여 4인의 좌평이 전사하고 3만 명에 달하는 사졸들이 전사하는 결정적인 타격을 입고 말았다.


 이러한 패전의 결과로 국내 정치정세도 심대한 영향을 받아 동성왕 이후 성왕 대까지 확립되었던 왕권중심의 정치체제가 귀족 중심의 정치 운영 체제로 전환하게 되었다. 이와 더불어 1세기 이상 신라와의 사이에 맺어졌던 나제동맹 관계는 이 싸움 이후부터 완전히 결렬되었다. 이리하여 양국은 최후까지 적대적으로 대결하는 구수(仇?)의 관계로 빠져버리게 되었으며 이는 한반도에 있어서 삼국의 역학관계의 성격을 결정짓게 되었다.



[영정개요]
-표준영정 지정년도: 2004
-제작 작가: 동강 권오창
-소장지 및 소장인: 부여 정림사지 전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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