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별 표준영정

서희 ((徐熙))
942(태조 25) ~ 998(목종 1) 고려의 외교가, 문신

 본관은 이천(利川). 자는 염윤(廉允), 시호는 장위(章威). 재상을 지낸 필(弼)의 아들로 19세 때인 960년(광종 11) 문과에 갑과로 급제, 내의시랑(內議侍郞)이 되었다. 972년(광종 23) 송나라에 가서 중단되었던 국교를 회복하고 송의 태조로부터 검교병부상서(檢校兵部尙書)라는 명예직을 받았다. 983년(성종 2) 병관어사(兵官御事, 국방부장관)가 되어 국왕을 수행하여 서경(西京)에 갔을 때 왕이 절에 가서 놀고자 했으나, 엄격한 성품인 그는 이를 간(諫)하여 중지하도록 했다.


 993년(성종 12) 10월 거란(契丹)이 침입하자 재상직인 내사시랑(內史侍郞)이었던 그는 중군사(中軍使)가 되어 적을 방어하였다. 전세가 불리해지자 조정에서는 서경 이북의 땅을 할양하고 화친을 맺기로 했으나, 서희는 이에 극력(極力) 반대, 자진해서 국서를 가지고 적진에 들어가서 적장 소손녕(蕭遜寧)과 7일 간 담판을 벌였다. 그는 이때 옛 고구려 땅이 거란의 소유라는 적의 주장을 반박, 고려가 고구려의 후신임을 내세워 적장을 설득하고 거란군을 철수시켰다.


 평장사(平章事)로 전보되어 이듬해부터 3년 간 장흥진(長興鎭)·귀화진(歸化鎭)·곽주(郭州)·귀주(龜州)·안의진(安義鎭)·흥화진(興化鎭)·선주(宣州)·맹주(孟州) 등 8개 지역의 여진족들을 몰아내고 성을 수축함으로써 청천강에서 압록강에 이르는 북계(北界)를 완전히 회복했다. 벼슬이 태보내사령(太保內史令)에 올랐으나 신병으로 57세에 서거하였다. 성종 묘정(廟庭)에 배향되고 덕종(德宗) 때 태사(太師)를 추증(追贈)했다. 아들 눌(訥)도 덕종 초에 수상직인 문하시중에 올랐다. 경기도 이천시에서는 2007년 설봉서원을 복원하여 매년 봄, 가을에 향제를 봉행하고 있다.


[영정개요]
- 표준영정 지정년도 : 2015
- 제작작가 : 동강 권오창
- 영정크기 : 세로180cm × 가로107cm
- 소 장 지 : 이천시 서희역사관

빠른 이동 메뉴
  • 주소 : (03060) 서울시 종로구 종로구 율곡로 33 안국빌딩 7층
Copyright © KCDF.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