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별 표준영정

윤관 (尹瓘)
?~1111(예종 6), 고려의 명장

 자는 동현(同玄), 본관은 파평(坡平). 문종 때 문과(文科)에 급제, 1088년(선종 5) 합문 지후(閤門祗侯)로 광주(廣州), 충주(忠州), 청주도(淸州道) 등지에 출추사(出推使)로 파견되었다, 1095년(숙종 즉위) 좌사낭중(左司郎中)으로 요나라에 파견되어 숙종의 즉위를 알렸다. 1098년에 동궁시강학사(東宮侍講學士)가 되어 조규(趙珪)와 함께 사신으로 송나라에 가서 왕의 사위(嗣位)를 알리고, 이듬해 <자치통감(資治通鑑)>을 기증받고 귀국하였다.


 1104년 추밀원사(樞密院使)로서 동북면행영병마도통사(東北面行營兵馬都統使)가 되어 여진(女眞)을 정벌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 후에 별무반(別武班)을 창설하여 군대를 양성, 1107년(예종 2) 여진 정벌군의 원수(元帥)가 되어 부원수(副元帥) 오연총(吳延寵)과 17만 대군을 이끌고 동북계에 출전하였다. 이때 함주(咸州), 영주(英州), 웅주(雄州), 복주(福州), 길주(吉州), 공험진, 숭녕(崇寧), 통태(通泰), 진양(眞陽) 등 9개 지역에 성(城)을 쌓아서 침범하는 여진을 평정하고 이듬해 봄에 개선, 그 공으로 추충좌러평융척지진국공신 문하시중 판상서이부사 지군국중사(推忠佐理平戎拓地鎭國功臣 門下侍中 刻尙書吏部事 知軍國重事)가 되었다. 이 해 여진이 계속 북변을 침범하여 다시 출전하였으나 패전하였다. 그 후 여진은 9성을 돌려줄 것을 요청하면서 강화를 교섭해 오자, 조정은 9주를 지키기 어렵다 하여 여진에 돌려주고 강화를 맺었다. 그 후에 그는 모함을 받아 패군의 책임을 지고 회군하는 도중 벼슬을 빼앗겼으며, 공신호마저도 삭탈(削奪)되었다.


 1110년에 다시 수태보, 문하시중, 판병부사, 상주국, 감수국사(守太保 門下侍中 判兵部事 上圭國 監修國史)가 되었으나 우울한 나날을 보내다가 죽었다. 예종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되었으며 시호는 문숙(文肅).


[文獻] 高麗史, 金庠基:尹瓘 等

[영정개요]
- 표준영정 지정년도 : 1979
- 제작작가 : 일랑 이종상
- 영정크기 : 세로180cm X 가로115cm
- 소 장 지 : 파주 윤관장군 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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