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별 표준영정

광개토대왕 (廉開土大王)
375(소수림왕 5)~413(광개토왕 23),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개척한 고구려의 제19대 왕

 역대 왕조 중 가장 강성하고 대륙적 기상이 웅비했던 고구려의 왕으로서 ‘광개토대왕’이란 칭호는 땅을 널리 개척한 임금이란 뜻으로, 생존 시에는 영락대왕으로 불리었다. 어려서부터 영웅적 기상과 웅대한 포부를 가진 대왕은, 아버지 고국양왕이 죽자, 391년 18세의 나이로 왕에 즉위하였다. 즉위하자마자 곧바로 국력신장에 진력하고, 군사훈련 강화 및 국민들의 정신결속을 위하여 불교를 장려하였다.


 백제의 석현(石峴), 관미성(關彌城) 등에서 백제군을 격파하고, 한강 유역을 점령하여 백제왕의 항복을 받았다. 신라의 요청으로 5만의 원병을 보내 왜구를 격파하고, 군사를 증강하여 402년 연나라 숙군성(宿軍城)을 공격하여, 404년 현도, 요동(遠東)의 2성을 빼앗았다. 연나라는 잃어버린 요동을 되찾으려고 수차례에 걸쳐서 공격해왔으나 이를 모두 격퇴시키는 한편, 회유책을 써서 모용희(募容熙)를 죽이고, 새로 즉위한 고운(高雲)과 국교를 열어 북방 경계선을 확정하였다. 요동을 정복하자 동쪽의 연해주 쪽으로 군사를 돌려, 송화강(松花江) 유역 거란족의 비려국(碑麗國) 등을 정복하여 복속시키고, 남으로 한강선(漢江線), 서로 요하(遼河), 북으로 송화강과, 동북으로 시베리아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확보하였다.


 또한 대왕은 중국을 제외한 어떤 나라도 사용할 수 없었던 ‘영락(永樂)’이란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여 우리의 주체성을 과시하였다. 이처럼 대왕은 영토만 넓힌 왕이 아니라 민족 주체적이고 자주적민 군주였다. 또한 정복한 지역은 회유하거나 타협하는 등 적절한 수완을 발취하여 광대한 영토를 유지하였다.


 대왕은 우리역사에 우뚝 선 영웅으로서, 우리들의 가슴속에 자부심을 심어주고, 무한한 가능성을 개척할 수 있게 한 왕이었다. 묘호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略稱 廣開土大王), 능은 만주 집안현(輯安縣)에 있으며, 그 비석에는 대왕의 생애와 업적이 적혀 있다. 일본이 지금도 주장하고 있는 가야가 그들의 식민지였다는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設)은 왜구가 고구려 군에 쫓기어 가야로 피신했던 사실을, 일본이 대왕의 비문을 조작, 왜곡했다는 것이 밝혀지는 등 대왕의 비문은 지금도 고대 동양의 역사를 밝혀주는 매우 귀중한 문화적 유산으로 평가되고 있다.

[文獻] 三國史記, 日本書記, 李弘稙 : 廣開土王 等

[영정개요]
- 표준영정 지정년도 : 1977
- 제작작가 : 일랑 이종상
- 영정크기 : 세로183cm X 가로113cm

빠른 이동 메뉴
  • 주소 : (03060) 서울시 종로구 종로구 율곡로 33 안국빌딩 7층
Copyright © KCDF.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