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야별 표준영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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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관 전주(全州). 함경도 영흥(永興) 출신. 1356년(공민왕 5) 아버지와 함께 고려에 내부(來附) 한 뒤, 금오위상장군(金吾衛上將軍)이 되었다. 1364년 원나라가 평안도에 침입하여 공민왕을 폐하려 하자 최영(崔瑩)과 함께 이들을 달천강(撻川江)에서 대파하였다. 1377년(우왕 3) 왜구(倭寇)가 개경을 위협하자 서강부원수(西江副元帥)로서

 초명은 수로(壽老), 자는 구부(懼夫), 호는 방촌. 본관은 장수(長水), 판강릉부사(判江陵府事) 군서(君瑞)의 아들. 개경(開京 ; 開城) 출신. 1376년(우왕 2)음보(蔭補)로 복안궁녹사(福安宮錄事)가 되었고, 1383년 진사시(進士試)에 합격, 1389년(창왕 1) 문과(文科)에 급제, 이듬해 성균관 학관(成均館學官)이 되었다.

 단군왕검(檀君王儉), 단웅천왕(檀雄天王)이라고도 한다. 친제(天帝)인 환인(桓因)의 손자이며 환웅(桓雄)의 아들로서, 서기전 2333년 아사달(阿斯達)에 도읍을 정하고 조선을 건국하였다. 단군에 관한 기록으로는 <삼국사기>, <제왕운기>, <응제시주>, <세종실록지리지> 등에 나타나고 있다. &

 충남 예산(禮山) 출신. 어려서부터 사람됨이 준수하고 담력이 강했으며, 3.1 운동이 일어나자 민족적 분개를 느끼고, 식민지 교육을 받지 않겠다고 자퇴하고, 서당에서 독학으로 공부하여 국사와 신학문을 공부하였다. 23세에 "장부는 뜻을 이루기전에 돌아오지 않는다"는 굳은 결심으로 중국 청도(靑島)로 망명하였다. &nbs

 충남 천안시(天安市) 병천면(竝川面) 출신.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나라사랑의 의지가 두터웠으며, 1918년 여자 전교사의 소개로 이화학당(梨花學堂) 고등과 교비생으로 입학하였다. 이듬해 3.1 운동이 발발하자 학생들과 함께 가두로 뛰쳐나가 만세시위를 벌였고, 일제 총독에 의하여 강제로 학교가 휴교에 들어가자, 고향에서 만세시위를 지휘하기 위하여 독

 역대 왕조 중 가장 강성하고 대륙적 기상이 웅비했던 고구려의 왕으로서 ‘광개토대왕’이란 칭호는 땅을 널리 개척한 임금이란 뜻으로, 생존 시에는 영락대왕으로 불리었다. 어려서부터 영웅적 기상과 웅대한 포부를 가진 대왕은, 아버지 고국양왕이 죽자, 391년 18세의 나이로 왕에 즉위하였다. 즉위하자마자 곧바로 국력신장에 진력하고, 군사훈련 강화 및

 이름은 법민(法敏),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의 맏아들. 어머니는 김유신(金庾信)의 누이인 문명왕후(文明王后) 김씨. 비(妃)는 파진찬 선품(善品)의 딸 자의왕후(慈儀王后)이다. 법민은 외모가 뛰어나고 머리가 총명하며 지략(智略)이 많은 사람이었는데, 650년(진덕여왕 4) 왕명으로 당(唐)나라에 가서 대부경(大府卿)의 벼슬을 받았고, 654년(무

 성은 김(金), 이름은 춘추(春秋). 이찬 용춘(龍春 : 龍樹)의 아들. 어머니는 진평왕의 딸 천명부인(天明夫人) 김씨(金氏)이다. 642년(선덕여왕 11)백제의 침입으로 대야성(大耶城)이 함락되고, 사위인 성주(域主) 품석(品釋)이 죽음을 당하자, 고구려와 힘을 합하여 백제를 치고자 고구려에 가서 연개소문(淵蓋蘇文)을 만났으나, 국경의 영토문제

 어려서부터 총명하였으며 학문과 무예를 열심히 닦아 장차 나라를 이끌 큰 인물이 될 것이라며 주위의 칭찬이 자자하였다. 법흥왕의 근신(近臣)으로서 벼슬이 내사사인(內史舍人)에 올랐다. 그가 장성하자 왕은 그를 공주와 결혼시켜 후계자로 삼으려 했으나 그가 다른 여인을 사랑하고 있다고 하자 왕의 노여움을 사서 고구려로 쫓겨났다.  고

 자는 백원(伯源), 호는 고산자(古山子), 본관은 청도(淸道). 황해도 출신, 어려서 서울로 이주, 미천한 가문의 출신이었으나 학문을 열심히 닦았으며, 정밀한 지도의 작성에 뜻을 품었다. 그는 지도를 만들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지(地志)가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지지란 역대 제도와 문물, 풍습 등과 지역과의 관계를 적은 것을 말한다. 그래서 역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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