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
다산 정약용을 일컬어 흔히 실학의 집대성자라고 한다. 실학이 당시대에 가장 긴요하고 절실하게 요구되는 학문임을 전제할 때 이 해석은 수긍된다. 정약용이 태어나서 살다 간 15세기 후반부터19세기 전반 조선사회는 중세농경사회에서 근대적상공업사회로 변화하는 시기였다. 따라서 중세농경사회에서 그 나름의 보편성과 합리성을 가진 철학체계로 사상적 지주가
소파는 동학사상의 적극적 실천 행동가로서 종래 어른의 부속품에 지나지 않던 아동들에 대해 우리나라 최초로 아동이 하나의 독립된 인격체임과 더불어 그 권익을 옹호 신장시킨 사람이 된 것이다. 그는 어린이의 독립된 인격을 인정하는 실천적 행동으로서 어린이 상호간에 인사할 때 마주 절하며 인사하게 할뿐 아니라, 그 자신이 어린 청소년을 상대로 맞절을
자는 이현(而見), 호는 서애(西豈)이며, 문충(文忠)의 시호를 받았다. 그는 16세에 향시에 들고 안동 도산(陶山)에 가서 퇴계에게 사사하였으며, 태학(太學)에 입학하고, 26세에 문과에 급제한 후로 관계에 나아가 이조좌랑, 도승지, 상주목사, 경상도관찰사, 대사간, 이, 예, 병조판서와 홍문관 부제학, 대제학, 대사간, 대사헌, 우의정, 좌의
사임당은 학자의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유교의 경전과 명현들의 문집을 탐독하여 시와 문장에 능했으나 남은 작품은 2편의 시문과 1편의 낙귀뿐이다. 율곡이 6살 때 친정 강릉을 떠나 서울로 가는 길에 대관령에서 지은 시문과, 서울에서 친정어머니를 기리며 지은 시문 그리고 낙귀 한 절을 통해 신사임당의 예술적 재능과 부모에 대한 효심을 느낄 수
박지원은 1737(영조 13년) 반남 박씨 사유(1703-1767)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자를 중미 또는 미중이라 하였으며, 아호는 연암 또는 열상외사라 하였다. 유년 시절에는 형 희원(1723-1787)의 재주에 힘입어 간접적인 영향을 받았으나 특별한 교육을 받지는 않았다. 그것이 조부에게서 양육된 탓이겠지만 타고난 재주를 연마할 기회가 없
겸재(謙齋) 정선(鄭敾)은 우리나라 회화사에서 가장 위대한 업적을 남긴 대화가로 화성(畵聖)의 칭호를 올려야 마땅한 인물이다. 겸재는 우리 산천(山川)의 아름다움을 사생(寫生)하는데 가장 알맞은 우리 고유 화법(畵法)을 창안해 내어 우리 산천을 소재로 그 회화미를 발현(發現)해 내는데 성공한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의 대성자(大成者)이기 때문이다.